가전고화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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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해남윤씨가전고화첩은 ‘자화상’과 ‘송하처사도’,『윤씨가보』라 쓰여진 화첩 2권과『가전유묵』이라고 꾸며진 서첩 3권 등이다. 1719년에 공재 윤두서의 맏아들인 낙서 윤덕희(1685~1766)가 여기저기 흩어진 아버지 윤두서의 유작을 모아서 꾸몄다.
1968.12.19일 보물 481호로 지정되었으며, 부속문화재는 윤씨가보 (보물 481-1), 가전보회 (보물481-2), 동국여지도 (보물 481-3), 일본여도 (보물 481-4)이다.
문화재관리국이 '미술의 해를 기념하여' 가전화첩을 영인하였다.


두 화첩의 겉 표제는 '가전보회(家傳寶繪)'와 '윤씨가보(尹氏家寶)'라고 되어 있다.


가전보회(家傳寶繪 : 화첩 권1)는 선면(헝겊이나 종이를 바른 부채의 겉면) 그림을 모아 놓은 것으로 숙종 30년(1704)∼숙종 34년(1708) 사이에 그려진 것이다.
윤씨가보(尹氏家寶 : 화첩 권2)는 크기가 다양하며 내용도 산수화·인물화·풍속화 등 여러 종류가 있다.

각 화첩 즉, 가전보회의 마지막 장에 "歲在己亥八月裝于白蓮谷 便面凡二十有二葉額三葉" 이라 쓰여 있고,  윤씨가보의 마지막 장에는 "己亥九月裝于白蓮谷 畵凡四十(六)幅額四幅"이라고 쓰여진 기록으로 볼 때 두화첩은 기해년 8월 과 9월에 꾸며졌으며 각각 25개와 44개의 작품을 모은 것으로 해남 백련동에서 표장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화첩이 꾸며진 경위는 이하곤(李夏坤)의 문집인 『두사초(頭蛇草)』중에 "1722년 남쪽 전역을 여행하던 이하곤은 11월 16일에 해남에 들려 녹우당에서 자게 되었는데 윤덕희가 아버지의 화권(畵卷)을 보여 주었다. 윤덕희는 다른 그림을 가지고 남의 집에 소장한 윤두서의 그림을 바꾸어 와서 그 중에 좋은 것만을 가리어 책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윤두서 사후 1722년 이전의 기해년은 1719년으로 볼 수 있고, 이 화첩을 꾸민 것이 윤덕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윤씨가보'중 '필정'과 '묵묘'에 찍혀진 도장들은 모두 윤덕희의 것들이다. 이 화첩의 표제는 윤덕희가 쓴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왕희지체를 본으로 삼은 동국진체를 구사하였다.

가전보회(家傳寶繪 : 화첩 권1)에는 25개의 부채가 모아졌는데, 便面二十有二葉과 額三葉을 실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중 편면(便面)이란 그림이 그려진 부채를 가리키며, 액(額)은 글씨가 씌여진 부채를 가리킨다.
윤씨가보(尹氏家寶 : 화첩 권2)에는 다양한 크기의 44개의 작품이 모여졌는데, 그 중 四十幅이란 한 면에 그려진 작은 그림을 가리키며, 額四幅이란 두 면에 걸친 가로 그림을 가리킨다. 이 중 (六)은 어떠한 의미인지 알 수 없다.

이 작품들을 본 이하곤은 "이것들은 평생에 뜻을 얻은 보배들이었다."라고 하며 그림의 높음을 지적하였는데 윤덕희가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정수만을 골라 모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전보회(家傳寶繪 : 화첩 권1)에는 산수도 및 산수인물도가 15작품, 화조도가 3작품, 말그림이 1작품, 고사인물도가 1작품, 사군자도가 1작품, 용그림이 1작품 등 22개의 그림이 실려 있다. 이 화첩은 모두 부채그림 만으로 되어 있고, 그림의 내용이나 화제, 곡식 등으로 보아 윤두서가 주변 사람들과 교분을 나누며 그려준 것들이 많은 듯하며, 순수한 인물화보다 산수도 또는 산수인물도가 대부분이며, 그림의 화풍도 전통적인 양식인 절파화풍(浙派畵風)의 특징이 많이 나타나는 접이 눈길을 끈다.
윤씨가보(尹氏家寶 : 화첩 권2)에는 산수도 및 산수인물도가 23작품이며,풍속화가 5작품, 나한도가 2작품, 인물화가 2작품, 고사인물도가 2작품 등 인물화가 11작품이고, 사생도가 3작품, 말그림이 5작품, 화조도가 2작품 등 모두 44개의 그림이 실려 있다. 이 화첩은 그림의 규모나 화제가 다양하고 화풍 또한 다양해서 윤두서의 개성이 좀더 분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각 그림마다 "윤두서인", "효언", "공재" 등 다양한 내용과 형태, 크기의 인장들이 찍혀 있어서 윤두서가 전각에 일가견이 있었던 것도 확인 할 수 있다.

가전화첩에서 또 한가지 주목되는 점은 이 화첩을 통하여 한국의 전통적인 표장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나라는 일제시대를 거치며 고유한 표장방식이나 기법을 거의 잃어 버렸고 아직도 전통표장의 실체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 두 가전화첩들은 원형이 변치 않은 중요한 화첩이며, 명문세가의 문화적 격조와 미감을 그대로 전해준다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이 두 화첩은 잔 치장이 없는 담백한 표장으로 윤두서 서화의 아취를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 모든 바탕은 종이로 꾸몄으며 종이는 대개 자연스러운 백지를 사용하여 문인의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였다. 화첩의 표지는 황색 빛의 두꺼운 종이 위에 간단하게 표제를 썼고, 그림을 각 면에 부착할 때는 공간의 운영이 절묘하게 함으로써 작품의 미감을 잘 살려 주고 또한 그 자체로 아름다운 느낌을 주게 하고 있다.

부채그림의 경우에는 화면의 아랫 쪽에 치우치게 붙여 시원한 여백을 주었고, 여러 크기의 편화들은 어느 정도 크기와 내용, 또는 분위기가 상통하는 그림들을 선택하여 화면의 중앙 하단으로 몰아서 공간감을 살리면서도 불규칙한 크기와 그림의 다양한 분위기 때문에 불균형스럽게 보이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이 두 화첩의 표장은 한국 전통표장을 연구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 미술사가 박은순 -